3일째
전날과 마찬가지로 3일째 아침 또한 경도 샘플에 대한 걱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Twist의 색상은 잡아놓은 상태였지만 마음에 드는 경도 샘플이 나오지 않는다면 제작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까.
공장에 도착한 나를 기다리는 것은 전날 생산 책임자가 밤새 작업한 경도 샘플이었다. 이때 조금 감동이었던 것이 그는 우리를 위해 경도별로 각기 다른 2가지씩을 제작해두었는데 이는 경도를 조율하는 작업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총 10가지 중에서 각기 가장 차이 나는 경도별 샘플 5가지를 골라내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의 세심한 배려 속에 우린 마침내 원하는 경도 베리에이션 샘플을 뽑아내었다. 이제 남은 건 패턴별로 색상과 퀄리티를 조율하는 일이었다. 그에게 연신 谢谢(xie xie) “고맙다”를 외치고 Clover의 퀄리티와 색상 조율을 위한 작업에 바로 들어갔다.
전일 Twist 색상을 조율해본 덕에 Clover의 색상 조율 작업은 생각보다 수월하리라 생각했다. 원하는 퀄리티를 뽑을 수 있는 온도를 정하고 그 온도에 맞는 색상을 조색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soft한 경도 탓에 퀄리티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담당 작업자를 조르고 졸라서 퀄리티를 조율해나가고 담당자가 힘든 기색을 표하면 다시 어르고 달래가며 계속해서 퀄리티를 잡아나갔다. 이건 여담이지만 나중에는 대놓고 하기 싫어하는 표정을 짓는 담당자를 위해서 한 갑에 약 9,000원 정도 하는 담배 한 갑을 손에 쥐여주며 당신이 힘들어하는 걸 알기에 이걸로라도 마음의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는 말과 함께 뇌물(?)아닌 뇌물을 쥐여주기도 했다. 중국 근로자들이 주로 피는 담배가 약 1,200~1,700원 사이의 가격이었으니 그에게는 무척이나 고급 담배였으리라.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Clover는 내가 원하는 자태를 지닌 채 최종 샘플로 탄생했다. 속된 말로 개고생 끝에 뽑아낸 최종 샘플이었으니 그 때 내가 느꼈던 만족감은 정말 한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었을 정도였다. 중국으로 넘어간 지 3일 만에 걱정없이 편하게 잠든 날로 기억한다.
4일째
주말이 지나고 맞이한 4일째에는 또 다른 난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Vacuum의 경도 수정 문제와 생산 단가 협의라는 큰 산이 남아있었는데, Vacuum의 경도는 한국에서 여러 번의 샘플을 받아보는 동안에도 전혀 수정되질 않고 있었다. Vacuum은 내부에 위치한 넓은 진공 파트를 통해서 강한 흡입력을 특징으로 하는 제품이었는데 경도가 너무 단단하게 제작되다 보니 아예 삽입이 안 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경도를 수정하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Vacuum에 맞는 적당한 경도를 찾아가는 작업이 그들에게는 역시나 무척 귀찮고 하기 싫은 일이었을 것이다.
담당자에게 우리가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이건 꼭 고쳐야만 하는 상황이며 우리는 한국에서 Test를 통해서 목표로 했던 점수를 달성했던 제품이기에 그와 맞는 경도를 꼭 잡아야 한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다행히도 그들 역시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주었고 경도를 조금 더 무르게 개선한 제품 샘플 3가지를 제작해주었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문제가 생겼다. 오나홀을 사용해봤다면 쉽게 알 수 있는 문제인데 이게 손가락을 이용해서는 이 홀이 어떤 느낌을 주는지 어떤 패턴을 가지고 있는지를 섬세하게 알 수 없다. 또한 기존 Vacuum의 문제는 단단한 경도로 인한 삽입이 불가능함이었는데, 현장에서 삽입이 수월해졌는지를 검증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에겐 3가지 해결책이 있었다.
1) 퇴근할 때 호텔로 가지고 가서 테스트한다.
2) 호텔에 뛰어가서 테스트하고 온다.
3) 화장실로 뛰어간다.(?!)
시간이 없었다. 퇴근할 때 호텔로 가지고 간다면 가장 편하고 확실한 테스트가 될 것이고 호텔로 뛰어가서 테스트하고 온다면 마음 편히 테스트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1분 1초라도 아껴야 한 번이라도 더 샘플을 만들어 볼 수 있을 테니까.
난 3가지 샘플을 가지고 화장실로 뛰어갔고 결과는 두 번째 경도였다. 사실 내 취향은 소프트에 가까웠기에 첫 번째 경도가 좋았으나 내가 한국에서 개발하고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던 Vaccum과 가장 가까운 경도는 두 번째 경도의 샘플이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담당자와 엔지니어는 경외하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들이 여태껏 수많은 클라이언트를 만나봤지만 경도를 조절할 거라고 현장에서 바로 테스트를 하고 오는 클라이언트는 처음이라고 厉害(li hai) “대단하다”를 연달아 외치며 엄지를 연신 치켜세웠다. 민망함 같은 감정은 상관없었다. 나에게 중요한 건 결국 Vacuum에 딱 맞는 경도를 찾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다음은 퀄리티 확보였다. Vacuum의 패턴 봉은 가장 얇은 부분이 약 4mm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좁은 패턴이었기에 제작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았다. TPE를 부어서 재료가 굳으면 패턴 봉을 뽑는 것이 일반적인 오나홀의 제작방식인데 Vacuum은 좁은 패턴 봉을 뽑을 때 내부의 벽을 긁으면서 뽑히기 때문에 내부 패턴의 퀄리티가 확보되지 않았다. 따라서 다른 패턴들보다 더 긴 냉각 시간을 필요로 했고 조금 더 냉각 시간을 늘려 생산한 결과 퀄리티가 개선된 Vacuum 샘플을 받아볼 수 있었다.
Vacuum 색상과 퀄리티 조율을 무사히 끝내자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조금은 민감한 주제일 수 있었던 단가 협상을 앞두고 있었는데, Loma Candle은 초기에 받은 제작 단가보다 이번 퀄리티를 조율하며 단가가 추가로 상승한 상황이었다. 여기에서 방문한 동안 퀄리티 퀄리티만을 주장하며 겁 없이 생산 프로세스, 냉각 시간 등을 늘린 결과는 어마어마한 단가 상승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제 앞에서 Twist 색상을 얘기하며 고정했던 220º라는 온도에 대해 얘기를 할 때가 되었는데, 우린 단가 협상 끝에 소비재라는 Loma Candle의 특성을 반영하여 퀄리티를 조금은 내려놓되 단가를 낮추자라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따라서 퀄리티를 낮추며 성형온도 또한 내려갈 필요가 있었는데 그리되자 다시 색상이 변하는 문제가 생겼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색상을 조율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결국 Loma Candle은 약 200º라는 온도를 전후하여 생산하기로 협의하고 양쪽이 조금씩의 양보 끝에 지금의 색상으로 완성되었다.
(최종 완성된 Loma Candle의 색상 및 퀄리티)
5일째
5일째는 뼈아픈 날이었다. 대량 생산을 앞두고 있었지만 Grab의 경우 가장 고비용의 생산 프로세스를 적용하지 않으면 내부 패턴에 크랙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정이 필요했다. Grab만 고비용으로 생산하고 제품 판매단가를 올릴지 아니면 Grab의 패턴을 바꿀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하지만 이미 테스터들을 통해서 제품 만족도를 달성한 제품을 포기하는 것은 고객의 여러 가지 needs에 대한 배신이었다. 따라서 비용 상승이 있더라도 Grab의 생산을 포기할 수 없었고 그렇게 최종 5가지 패턴에 대한 최종 생산 진행을 지시했다.
생산 진행 지시를 끝낸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돌아보면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만족했던 일도, 아쉬운 일도 많았다. 물론 인생은 선택과 후회의 연속이기에 회고한다면 조금 더 잘할 수 있었고 같은 시간 내에 조금 더 많은 걸 할 수 있었다고 아쉬움도 조금은 있지만, 처음 목표로 했던 로마 캔들의 색상과 경도, 퀄리티 조율을 달성한 점이 날 위로해주고 있었다.
10. 우리가 만족한 만한 제품
392일.
첫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로마 캔들을 출시하기까지 걸린 기간이다. 1년하고도 1개월. 누군가에게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써온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약 1년이 넘는 기간 동안의 여정은 쉽지만은 않은 무척이나 험난한 여정이었다.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원하는 제품을 생산하기까지 샘플을 만들고, 테스트를 진행하고, 다시 수정하고, 퀄리티를 위해서 한국에서 중국으로 생산공장을 옮기기까지.
이 모든 것은 1화에서 언급했던 우리 제품이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점이 뚜렷했기 때문에 지치지 않고 달려올 수 있었다.
- 최고의 자극을 추구한다.
- 최소한의 퀄리티가 보장되어야 한다.
- 사용자 욕망을 반영한 제품 설계여야 한다.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고, 꼭 지켜야 할 가치를 가진 제품을 내놓기 위해 집착했던 시간이었기에 돌아보더라도 후회는 없다.
(최종 출시한 로마 캔들 5종 / 퓨어, 웨이브, 버큠, 트위스트, 그랩)
물론 제품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다면 이 모든 것은 훨씬 더 빠르게 진행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린 우리가 만족할 만한 제품(우리가 만족하고 부끄럽지 않은 제품이어야 고객들에게도 진심이 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을 탄생시켰고 392일이라는 기간 동안 열심히 달려왔기에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정말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고 싶었던 우리의 마음이 전달되길 바라며 길고 길었던 Loma Candle의 제작기를 마무리한다.
Editor : Product Designer Gr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