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물 받을 사람을 찾습니다
요청을 받고 처음엔 조금 고민했다. 개인적인 섹슈얼리티에 대해선 꽤나 도전적이지만 사실 성생활 관련 이야기를 지인들과 스스럼없이 즐겨하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그런 쪽으로 상당히 담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흥을 즐기는 성격도 아닌데다가 애초에 성생활에 관한 대화는 주로 이성간의 관계가 중심이 되기 때문에 의무적인 연애를 지양하고 혼자의 시간을 즐기는 편인 내가 관련된 이야기를 할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왠지 정적일 것 같고 담백할 것 같이 잘 포장된 겉 껍데기 덕분에 선물할 대상을 선정하는 것에서부터 난관이 생겼다. 아무에게나 떠밀려 전해주는 것이 아닌, 진짜 마음을 담아 선물하고 싶은데 누구에게 줘야 서로가 기분 좋을 수 있을 지 알 수 없었던 것이었다. 특히 보수적인 한국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서 친한 지인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많았는데, 그들에게 함부로 선물했다간 의도치 않은 실례를 범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선택지는 더욱 좁아졌다. 고뇌의 시간이었다.
그 때 생각난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나의 영원한 룸메이트 H씨다. H씨는 잠시 해외생활을 했을 때 함께 룸 쉐어를 했던 룸메이트인데, 속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내가 마음 터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몇 되지 않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나와 H씨는 자라 온 환경이나 라이프스타일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서로의 삶을 경청 했는데, 그래서 더욱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당시에 H씨와 각자의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소중한 H씨는 결혼을 목전에 앞두고 남자친구와 동거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 또한 몇 달 전 H씨를 보러 갔다가 함께 살고 있던 H씨의 남자친구와 면을 텄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선물하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심지어 청첩장을 받기 위해 약속을 해 둔 상태여서 좋은 타이밍이었다. 선물로 준비한 로마 글로스 이지핏 센슈얼 트래블 박스가 연인끼리 즐기기에 좋은 구성이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결혼을 앞 둔 커플에게 섹스토이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게 되다니, 내 인생에서 있을 거라곤 상상치도 못한 화끈한 시도였다.
💝 제 선물을 받아 주세요
대망의 만남 당일, 고대하던 때가 왔다. 그리고 처참히 실패했다. 이것 저것 챙기다 보니 선물을 집에 그대로 둔 채로 약속 장소에 도착한 것이었다. 새카맣게 잊고 있다가 H씨를 반갑게 맞이한 그 순간, 덩그러니 놓여져 있을 선물이 생각나버렸다. 이번 기획은 진정 망했나싶어 속으로 눈물을 삼키던 중 H씨가 근황을 물어왔다.
H: 요즘 어떻게 지내? 뭐 새롭게 업데이트 된 일 있어?
나: 요즘? 기존에 하던 일 계속하고… 아, 나 프리랜서 콘텐츠 에디터로 일 하고 있어.
H: 오, 어떤 건데? 나: 회사 블로그에 웹진처럼 매주 콘텐츠 연재해. H: 우와, 진짜? 어떤 회사야?
기회는 이 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H씨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나: 라이프스타일 콘텐츠를 발행하는데, 사실 섹스토이 브랜드야. 그래서 내 경험 바탕으로 섹슈얼리티 관련 콘텐츠 기획하고 글 쓰고 그래.
H: 대박. 재밌겠다!
나: 그래서 그런데, 내가 H씨랑 남자친구한테 회사 제품을 선물하고 싶은데 어때? 결혼 선물 겸, 크리스마스 선물 겸 해서.
H: 헉, 난 너무 좋지! 남자친구도 좋아하겠다. 크크.
나: 남자친구가 쟤는 대체 뭐하는 애냐고 생각하는 거 아냐? 그치만… 난 원래 이런 애인걸…
결혼식 때 서로 민망해서 인사도 못하는 거 아니냐며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깔깔 웃었다.
H씨와 헤어지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선물 보낼 채비를 시작했다. 로마 글로스 이지핏 센슈얼 트래블 박스는 이미 예쁘게 포장된 상태로 배송이 왔기 때문에 미리 준비한 카드와 함께 꼼꼼히 택배 포장을 한 뒤 H씨에게 다시 배송! 곧 선물을 잘 배송받았으며 써 보고 후기를 남겨주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추가 후기) 그리고 며칠 뒤 고대하던 후기가 도착했다. 택배가 도착한 날 남자친구와 함께 사용해보았다는 H씨. 겉으로 봐서는 바이브레이터인 것을 전혀 알 수 없는 외형에 둘 다 꽤 놀랐다고 한다. 섹스토이를 보내준다고 해서 얼마나 적나라할 지 궁금했다는데 확실히 이런 제품이라면 친한 지인을 위한 선물용으로 부담 없을 것 같다는 평이었다. 기능에 대해선 한줄평을 남겼다. ‘작은 바이브레이터가 맵다.’ H씨 남자친구와의 관계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것 같지만 덕분에 애인과 좋은 시간을 보냈다니 그런 게 대수인가 싶었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크리스마스 기념 섹스토이 선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소중한 사람에게 섹스토이를 선물하는 경험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 만큼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선물한 섹스토이를 통해 그들이 좋은 시간을 보내고, 그 관계가 더욱 돈독해질 것을 알기에 마치 그 즐거움을 선물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행복한 시간을 보낼 사람들을 생각하면 절로 마음이 따뜻해진다. 앞으로 섹스토이를 선물하는 일들이 더욱 잦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